본문 바로가기

라이프/기타

백영옥의 자동차 일상다반사 - 오리건 자동차 번호판

서울시 아침 기온이 10도까지 떨어진 다음날 백영옥 작가의 글이 도착했습니다. 평소의 두배는 됨직한 빼곡한 글, 자동차 번호판을 찍은 사진까지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척봐도 시간과 정성을 들인 글에 감사와 미안함이 교차할 찰나, 작가는 "이번 칼럼은 짧은 소설입니다. 좀 길어요... ㅠ.ㅠ 그래도 실어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겸손한 메모를 덧붙였습니다. 한 여자의 여행과 의식을 따라가는 이야기는 담담한 목소리로 상실과 고통을 술회합니다. 그렇다고 아프기만한 건 아닙니다. 낯선 남자의 쉐비로 오리건의 숲을 지나는 길에서 여자는 희망의 기운을 회복합니다


힘겨운 일이 많았던 한해가 저물어 가는 이때, 이글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틀랜드로 여행을 떠난 백영옥 작가가 한국지엠 12주년에 즈음해 보낸 선물, 단편소설 '오리건 자동차 번호판'입니다. 한국지엠 톡 블로그 운영진



쉐보레 에퀴녹스




 오리건 자동차 번호판 



 그녀는 뉴욕 JFK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선 도통 책을 읽지 못하는 편인데, 어쩐 일인지 정혜윤의 에세이 ‘침대와 책’ 만은 아주 천천히, 조금쯤, 읽을 수 있었다. 트렁크에 책을 잔뜩 가져왔지만 막상 뉴욕에선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하지만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던 며칠, 새벽에 책을 들고 읽었다. 그때, 읽다가 눈을 도저히 뗄 수 없었던 장면은 '버지니아의 울고 다니는 여자'.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영원히 '조승희(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 가해자)의 누나'로 남게 될 한 여자에게 대한 편지였다. 그리고 석달 후 일어난 코네티컷의 총기 난사 사건을 보며 문득, 그때 읽었던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인생이 영원히 변해버린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런 거다. ‘사람들에게 유령들에게 동물들에게 사물들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도 심지어 혼자 말하는 사람도 오로지 혼자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작은 동네에서 아이 엄마 한 명이 살해당했다. 비슷한 시간 뉴욕의 지하철에서 한인 한 명이 지하철에 치어 죽었다. 그는 ‘맨해튼 49가 역에서 사망한 한국인 한모씨’로 달려오는 지하철에 그를 떠밀어 죽음에 이르게 한 남자는 정신 질환을 앓던 스물아홉의 흑인이었다. 특종을 보도한 건 뉴욕 포스트였다.


 한 장의 사진이 문제였다. 사진은 비극적인 한 남자의 마지막 죽음을 생생히 담고 있었다. 사진을 찍은 기자는 뉴욕포스트의 프리랜서 기자인 ‘우마 압바사’였다. 곧 그가 사고 현장에서 사람을 구출하지 않고, 사진만 찍은 것에 대한 비난이 일기 시작했다. 기자는 “피해자가 트랙에 떨어진 직후, 전동차 쪽을 향해 달려가면서 플래시를 연속해서 터뜨렸다. 기관사가 내 플래시 불빛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 죽어갈 때마다, 누군가 태어난다. 

 노인의 죽음은 아기의 탄생을 의미하며 

 죽음과 삶은 묶여 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걸 모를 나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살인사건, 교통사고 사망소식, 총기사고나 침몰 사고의 기사를 볼 때마다,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무너졌다. 돌이킬 수 없이 많은 눈물이 흘렀다. 그해, 그녀는 상실을 다룬 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니콜 클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를 읽다가, 감정을 처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했다. 슬픔이나 분노, 실패를 분리하면 그것들이 쪼개져 견딜만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기로 한 것이다.

   

 “매일의 작은 모욕감은 간이 맡는다. 췌장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충격을 관장한다. 췌장이 얼마나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당신이 안다면 놀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오른쪽 신장이 맡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느끼는 실망은 왼쪽 신장이 맡는다. 개인적인 실패는 창자의 몫이다.”


 시간이 흘렀다. 

 

 2년을 쉬고, 그녀는 회사에 복직했다. 그녀의 첫 출장지는 포틀랜드였다. 숲의 도시였던 포틀랜드는 일주일에 최소한 500명의 젊은이들이 유입되고 있는 젊은 도시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조용한 시골 동네였던 포틀랜드는 한국의 제주도처럼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 지친 젊은이들을 자석처럼 끌어 모았다. 그녀는 취재 때문에 그곳에 바쁘게 도착했다. 포틀랜드에서 ‘킨포크’(kinpork)라는 라이프스타일 잡지의 편집장을 만날 예정이었고, ‘도시 트래킹’이란 주제의 숲 관련 기사를 쓸 계획이었다. 


 시애틀의 시택 공항에 내렸을 때, 그녀의 짐은 배낭 하나였다. 그녀는 비행기를 갈아타는 대신 포틀랜드까지 가는 자동차를 선택했다. 시애틀에서 포틀랜드까지는 3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였다. 그녀는 공항 주차장 앞에서 한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 그녀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는 사람의 친구의 친구였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친구의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 그 친구의 친구가 나오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차피 둘 다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상관없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185센티미터 정도의 남자가 그녀에게 가볍게 손짓을 했다. 남자는 검정색 야구 모자를 쓰고 빨간색 쉐보레 앞에 서 있었다. 트렁크는 열어놓은 채였다. 그녀는 재빨리 트렁크를 닫고, 조수석에 탔다. 배낭은 뒷좌석에 던져 놓았다. 남자가 멋쩍은 듯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시동을 걸었다. 고속도로로 쪽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차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차에 앉아 조는 건 꽤 민망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틀간의 야근, 9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던 그녀는 조수석에 앉아 졸고 말았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믿기지 않는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보였다. 하늘은 맑았고, 처음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나무들이 그녀 주위를 압도하듯 포진하고 있었다. 


 “조금 더 자요. 이제 오리건 주에 진입했어요.” 

 “창문을 열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남자가 창문을 열었다.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뺨에 와 닿았다. 숙취처럼 가시지 않던 두통이 조금쯤 가라앉았다. 

 “아..... 오리건 주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나무가 있네요.” 

 그녀는 앞으로 빠르게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말해 버렸다’라고 하는 게 더 정확했다. 자동차 번호판의 ‘전나무’ 색깔은 초록색이었다. 나무는 알파벳과 숫자 사이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은 이미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내리던 갑작스런 빗소리에 완전히 묻힌 후였다. 


 “오리건 날씨는 예측 불가능해요. 비가 왔다가 멀쩡하게 개었다가, 다시 비가 내렸다가 하거든요.” 

 남자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는 오리건에선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자는 자동차의 오디오를 켰다. 나지막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누구의 노래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노래의 제목을 묻지 않았다. 

 “이름이 뭐였죠? 친구에게 전해 들었는데, 잊어버렸어요. 이름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막 차선을 바꿔 탄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말없이 달리고 있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2년 전, 뉴욕에서 만났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남자는 나무를 찍었다. 남자는 나무를 찍기 위해, 나무가 아주 많거나, 아주 희귀한 곳을 자주 여행 다녔다. 남자는 야쿠시마의 7500년 된 삼나무를 찍었고, 고비 사막의 죽은 나무를 찍었고, 나무가 아주 많은 도시로 이동해 며칠이고 머물렀다. 


 오리건 주를 달리는 모든 자동차의 번호판에는 그의 말대로 정말 ‘크리스마스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멀티노마 폭포에서 남자는 그녀에게 사진 한 장을 보냈었다. 폭포수가 하얗게 쏟아지는 숲 속의 폭포. 남자는 그곳에서 자신의 '아이다호‘를 발견했다고 말했고, 여자는 그 사진이 여자의 음부를 닮았다는 걸 알고 얼굴이 발개졌다.   

 

 “이름이 뭐였죠? 계속 ‘여기’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남자가 물었다. 

 어느 순간 비가 그치고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땅을 향해 내뱉는 농담을 보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커튼이 있어서 커튼을 치고 닫는 것으로 날씨를 가늠하는 듯, 날씨는 계속해서 바뀌었다. 여자는 바로 앞에 달리는 자동차를 바라보다가 남자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목목. 강목목.”

 “네?” 

 “제 이름은 강목목이에요. 이름이 목목. 성이 강. 나무 목이 두 개인, 목목.” 

 “그럼 한자로 풀면 수풀 ‘림’林이네요?”  

 “맞아요.”

 “역시! 한 번 들으면 잊을 수가 없는 이름이었네....”

 “.......” 

 “본명이에요?” 

 “아뇨.”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름에 대한 얘기가 좀 복잡해요.”

 “궁금하네요. 실례가 안 된다면 듣고 싶어요. 포틀랜드까지는 아직 한참 더 가야하니까.”

 남자가 음악의 볼륨을 조금 줄였다. 


 여자는 잠시 죽은 애인의 애인으로 사는 일이 어떤 것일까 상상했다. 아마도 죽어버린 사람을 잊지 못하는 건, 과거 속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달리는 차 밖에 보이는 나무가 그려진 오리건의 자동차 번호판을 보자, 그녀는 문득 과거가 꼭 과거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어요.”

 “아! 미안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가 공연한 걸 물었네요.” 

 “아뇨.”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지하철 사고였어요. 2년 전에 뉴욕에서 일어난....” 


 그녀는 열어놓았던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머릿속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비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얼굴을 빼냈을 때, 얼굴에는 눈물 같은 빗물이 잔뜩 흘러내렸다. 그녀는 창문을 닫았다. 진공의 고요함이 차 안에 깃들었다. 그녀는 바로 앞에 달리는 자동차 번호판의 전나무를 바라보았다.  


 “전 사주에 나무가 아주 많아요.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대요. 우린 서른 살이 되면 부모가 지어준 원래의 이름 대신,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진짜 이름을 짓는 법안에 대해 자주 얘기했어요. 전 그 사람의 이름을 ‘소요’라고 지었고, 그 사람은 제 이름을 ‘목목’이라고 지었어요. 전 걷는 걸 좋아해서 늘 나무 주위를 산책했거든요. 소요하다. ‘이리저리, 천천히, 걷다’라는 뜻이에요.”

 “소요...... 느낌이 좋군요.”

 남자가 말했다. 그는 여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오디오의 버튼을 완전히 꺼버리고 싶었지만 그는 간신히 그것을 참고 있었다.  

 “소요는 운전하는 걸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소요는 한 동안 제 이름을 짓지 못하고 고민했는데 어느 날, 오리건 주를 여행하다가 자기 앞에 서 있던 자동차 번호판을 보고 문득 제 이름을 생각했대요.”  

 여자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나른해졌다. 

 그러나 여자의 잠은 이미 저 멀리까지 달아나 버린 후였다. 그들에겐 아직 2시간의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잠시 해가 스며들다가, 다시 비가 내렸다. 서쪽 하늘엔 하얗게 맑은 구름이 잔뜩 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달려 그곳으로 당도하면, 비는 또 거짓말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전형적인 오리건 주의 날씨였다. 

 “소요와 어떻게 만났나요?” 

 남자는 오리건의 자동차 번호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많은 번호판들이 그의 눈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번호판과 번호판 사이의 전나무는 그녀의 말처럼 명백한 초록색이었다. 이제 그에게 오리건의 자동차 번호판들은 조금 다르게 보일 것이었다. 남자는 오디오를 껐다. 창밖으로 끊임없이 창문을 두들기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그쪽은 이름이 뭐죠?”

 여자의 목소리가 9월의 나무들처럼 푸릇하게 흔들렸다. 


글 ㅣ 백영옥(소설가)



※ 본 컨텐츠는 칼럼니스트 개인의 생각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내용에 있어 한국지엠 톡 블로그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지엠 12주년 EVENT - 매일매일 참여할수록 풍성한 혜택이 제공됩니다! - 이벤트 참여하러 가기

한국지엠 이 순간, 12가지 이야기! - 한국지엠 12주년 이야기를 플립보드 매거진으로 만나보세요~ - 플립보드 매거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