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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의 어느 바람 부는 여름날이었다. 아직 외환위기라는 대재앙이 대한민국을 쑥대밭으로 바꿔놓기 전이었다. 젊은이들은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갔다. 압구정동은 마르샤를 타고 “야, 타”만 외치면 예쁜 여자들과 즉석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는 전설이 서린 동네였다. 모두들 오렌지족과 엑스맨으로 변신해서 로데오 거리를 활보했다.
그날도 바람이 불었다. 압구정동에 한번 나가보고 싶었다. 마음은 오렌지빛인데 신세는 자취생이었다. 친구 차가 한 대 있었다. 티코였다. 친구와 얘기했다. “솔직히 티코로 야타족은 못되겠다. 대신 한 바퀴 구경만 하고 오자. 어차피 우린 차 안에 있으니까 상관 없잖아.”
상관 있었다.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차로 한 바퀴 도는데 5분도 안 걸렸다. 그래도 별천지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멋져보였다. 친구가 말했다. “우리 한 바퀴 더 돌까?” 대답했다. “그러자.” 두세바퀴쯤 돌 때였다. 누군가 창문을 똑똑거렸다. “아저씨, 길 막히거든요. 충남 티코는 좀 빼요.”
그 시절엔 지역 넘버란 게 있었다. 차량 번호가 지역명으로 시작했다. 어느 동네 차량인지 손쉽게 알 수 있었다. 로데오 거리를 두 세 바퀴 돌며 두리번 거리는 행색이 영낙 없는 촌놈들이었다. 충남 번호판이 아예 지역색까지 말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작은 티코였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운전대를 잡은 친구도 얼굴이 벌개졌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도대체 뭐가 미안한지도 몰랐다. 그렇게 쫓겨나다시피 압구정동을 벗어났다. 그 뒤로는 바람 부는 날에도 압구정동엔 찾아가지 않았다.
외환위기는 세상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오렌지족도 야타족도 로데오 거리도 압구정동도 거품 붕괴와 함께 쓸려가버렸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거품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람 부는 날들의 거품과는 양상이 좀 달랐다. 외환위기 이전의 거품은 온 세상을 다 뒤덮었다. 외환위기 이후의 거품은 한쪽 끄트머리 세상에서 더 거대하게 부풀어올라서 나머지 세상을 압도하는 형국이었다. 1%가 만들어낸 거품이 나머지 99%를 뒤덮는 거품이었단 얘기다. 더 크고 더 위태롭고 더 반동적인 거품이었다.
이런 양극화는 자동차 시장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났다. 자동차는 집보다도 더 노골적인 신분 증서다. 어디 사는지는 가봐야 알 수 있다. 자동차는 스스로 끌고다니며 자신의 계급을 드러낸다. 한쪽에선 들어본 적도 없는 외제차가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한쪽에선 평범한 중형차와 작은 소형차들이 주차할 자리를 찾아 다녔다. 외환위기 이전엔 유차계급과 무차계급으로만 나눠졌다. 차만 있어도 충분했다. 이젠 배기량이 얼마고, 차 값은 얼마고, 어느 나라 차고, 유명인 중에 누가 타고 다니며, 제로백은 얼마인지 따져서, 촘촘하게 유차계급 사이의 세부계급을 나눴다.
그 사이 어딘가에 뚜벅이로 한참을 서 있었다. 차를 안 사고 버텼단 말이다. 차를 살 처지도 아니었다. 형편이 좀 나아질 때쯤 중고 마르샤를 400만원에 샀다. 하필 마르샤였다. 어쩌면 1996년 바람 부는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건지도 몰랐다. 마르샤는 한때 강남 아줌마 차의 대명사였다. 한참 세월이 흘렀다. 당연히 이미 마르샤의 시대는 아니었다. 강남 아줌마 차는 렉서스를 거쳐 포르쉐 카이엔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단종된 중고 마르샤를 샀다. 어쨌든 갖고 싶었다. 400만 원짜리 허세였다.
한국지엠의 창원 공장에 갈 일이 있었다. 창원 공장의 경차 주차장에 당도했을 때 얼어붙고 말았다. 모든 자동차가 평등한 세상이 여기에 있다. 그곳엔 비싼 차도 큰 차도 화려한 차도 요란한 차도 없었다. 그곳에 주차된 자동차들 사이엔 왕후장상 사노공상이 따로 없다. 마티즈부터 스파크까지 세대만 다른 미니카 수백대가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차 주인들 사이엔 서열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는 김 부장이고 누구는 박 대리고 누구는 브라만이고 누구는 수드라일 수도 있다. 차만 보면 알 수가 없었다. 사람 사이엔 계급이 있어도 자동차 사이엔 계급이 없었다. 적어도 자동차가 사람의 계급장 노릇을 하지는 않았다. 존 레논이 <이매진>을 부르며 떠올랐던 세상이 여기에 있었다. “모든 자동차가 평화롭게 살고 비싼 차나 큰 차에 대한 탐욕이나 배고픔이 없는 세상” 말이다.
마르샤를 타면서 도대체 뒷좌석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많았다. 어차피 혼자 타는 차였다. 뒷좌석은 늘 텅텅 비어있곤 했다. 차가 이렇게 크고 넓찍할 이유가 없었다. 가격 대비 성능이 우수하다고 우겼다. 성능 대비 연비가 형편 없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했다. 점점 필요한 차는 원하는 차보다 훨씬 작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차는 분명 패션과 닮아 있다. 남자는 나이가 들면서 재단된 수트의 매력을 깨달아간다. 몸에 맞춘 옷이 가장 멋진 옷이다. 군더더기도 필요없다. 미니멀한 멋을 알게 된다. 차도 마찬가지다. 차가 만능일 필요는 없다. 필요한 기능이면 충분하다. 절대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 필요한 만큼만 크면 충분하다. 충분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산업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말했다. “좋은 디자인은 가능한 덜 디자인하는 것이다.”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는 말했다. “단순한 것이 늘 최고는 아니지만 최고는 늘 단순하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말했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 한국지엠 창원 공장에서 작지만 충분한 차들의 아름다움을 흡입했다.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바람부른 날 압구정동에 갔던 그 날도 충남 티코를 탄 일로 부끄럽거나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마음에 불필요한 거품이 끼어 있었다. 충분한 걸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이젠 알아버렸다.
생각해보면 한국지엠 창원 공장은 국민차 티코의 고향이었다. 1991년에 출시된 티코는 10만 대나 팔려나갔다. 차가 있는 사람과 차가 없는 사람으로 구분되는 계급성을 무너뜨려 버렸다. 국민차였다. 사실 어느 나라에서나 국민차의 출현은 정치적 혁명이다. 유차계급과 무차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자동차 소유의 벽을 혁명적으로 허물어버리기 때문이다. 티코가 설계된 때가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고 6공화국이 출범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는 건 꽤 시사적이다. 1987년 직후는 분명 정치적 민주화의 시대였고 경제적 분배의 시대였다.
국민차 티코가 꿈꿨던 자동차 평등 세상은 세월히 흐르면서 흘러간 옛 노래가 돼버렸다. 자동차의 계급성은 오히려 강화됐다. 배기량이 늘어나고 값은 비싸지더니 수입차까지 가세하면서 양극화 현상까지 벌어졌다. 티코나 포니나 프라이드가 활보하던 국민차 시절에도 자동차가 계급장이 아니었던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소유한 자동차가 모태 계급장 역할을 하진 않았다. 젊은 소비자들까지 과감하게 고가 수입차를 구매하는 시대가 되면서 자동차의 계급성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확장됐다. 그런데 국민차의 고향인 그곳 창원의 경차 주차장에선 아직도 평등 세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창원공장 경차 주차장의 풍경은 오래 뇌리에 남았다. 결국 작은차를 선호하는 취향으로까지 발전했다. 작은차는 태생적으로 자동차의 계급성을 전복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덩치는 작은데 빠르고 맵시 나는 작은차로 과시적인 큰 차들이 만들어낸 위계 질서를 깨보고 싶었다.
곧 마르샤를 팔아치웠다. 그 뒤로 작은차만 탔다. 대신 운전은 좀 까칠해졌다. 작고 예의 없는 운전자가 됐다. 그렇게 작고 도발적인 차만 골라 탔다. 그렇게라도 세상의 허세와 허영에 대들어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바람 부는 날 부끄러워했던 스스로가 안쓰러웠다. 자기 계급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한테 자긍심이란 없다.
그리고, 미니를 만났다. 미니는 전복적인 미니멀리즘의 차였다. 1959년 8월 26일에 첫 선을 보인 미니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8% 안팎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던 서독이나 프랑스만큼은 아니지만 영국한테도 1960년대는 성장기였다. 자동차 구매에 대한 욕구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싸지만 강하고 작지만 큰 국민차에 대한 필요가 무르익었단 얘기다.
1960년대 일본의 국민차였던 도요타 코롤라나 프랑스의 국민차였던 시트로엥의 2CV 같은 차들도 모두 비슷한 배경에서 개발됐다. 미니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알렉 이시고니스가 미니에 멋을 실었다. 이시고니스는 미니를 미니멀하게 디자인했다. 군더더기라곤 없었다. 어차피 군더더기가 껴들 자리가 없을만큼 작은 차였다. 미니의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은 부자들이 타는 고급차의 멋부린 장식들을 오히려 군더더기처럼 보이게 만들어버렸다.
알렉 이시고니스의 친구였던 존 쿠퍼는 미니에 힘까지 실었다. 존 쿠퍼는 미니 쿠퍼 S를 끌고 1964년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우승했다. 이시고니스와 쿠퍼의 영향을 컸다. 멋과 힘을 겸비한 미니는 더 이상 가난한 서민들의 국민차가 아니었다. 귀족와 부자들도 앞다퉈 미니를 타기 시작했다. 유명 연예인들과 스포츠 스타들도 미니를 탔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정말 미니를 타고 싶어서였다.
미니 혁명이었다. 런던 거리는 창원 공장 경차 주차장처럼 변했다. 자동차의 계급성이 타파됐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유명한 자든 무명인 자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두 같은 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서민들이 비싼 차를 빚내서 산 게 아니었다. 부자들이 작은 차를 멋부리며 탔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국민차란 99%의 국민들이나 타는 차를 뜻했다. 이탈리아 피아트의 500이나 독일 폭스바겐의 비틀 같은 전설적인 국민차가 있었지만 99% 국민차란 한계를 뛰어넘진 못했다. 피아트의 500은 바퀴가 넷 달린 스쿠터와 흡사했다. 스쿠터를 좋아하는 이탈리아 국민들은 500을 사랑했지만 과시하길 좋아하는 이탈리아 부자들은 마세라티나 부가티를 즐겼다.
미니는 그걸 넘었다. 1%가 99%에 동의하게 만들었다. 강압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99%가 더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잠시나마 자동차의 계급성이 타파됐다. 그 뒤로도 미니의 혁명성은 영국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산업혁명을 일으켰으며 아담 스미스의 후손인 영국인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느 나라 국민들보다도 오래 자본주의를 경험했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구상한 곳도 런던 대영박물관이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의 별개로 영국의 서민들도 자본주의적 모순을 견뎌내는 민간 요법을 개발했다. 검소한 멋부림이다. 작지만 큰 미니야 말로 그런 영국적 지혜를 함축한 차였다.
또 한번의 미니 혁명을 꿈꾼다. 사실 한국은 그런 혁명을 일으키고도 남는다. 미니 혁명은 당대 제조업 강국이었던 영국 산업이 빚어낸 결과였다. 한국 자동차 산업도 아직은 당대 영국만큼 효율적이며 창의적이다. 다만 조금만 더 전복적이기만 하면 된다. 오늘도 바람 부는 날엔 한국의 미니를 갈망한다. 한국지엠 창원 공장의 경차 주차장처럼 모든 차가 평등해지기를 꿈꾼다. 그 차들 하나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날래고 가장 멋지길 바란다. 작은차가 곧 거리의 혁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