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가면 늘 이성당에 들린다. 팥빵을 사기 위해서다. 전국구 빵집인 탓에 이성당은 다양한 지방에서 온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예상대로 팥빵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남아 있는 빵 몇 개를 사서 급히 차에 탔다. 주차장에 차가 너무 많아서 임시로 갓길에 차를 세워놓았기 때문이었다.
차를 타고 시내 쪽으로 더 들어가려고 좌회전을 하다가 한 남자가 차 앞에 불쑥 튀어나와 서는 걸 보았다. 워낙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차는 남자 앞에서 정확히 멈춰 섰다. 하지만 남자는 마치 차에 치이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무척 고통스럽다는 얼굴로 대뜸 가슴팍부터 움켜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저 아저씨, 멀쩡히 걸어와서 왜 저러지?”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기이한 장면이었다.
뒷이야기를 쓸 것도 없이 이 일화는 어느 어수룩한 군산 남자의 ‘자해 공갈’에 관한 이야기다. 이성당에 각지에서 몰려든 손님들이 워낙 많다보니 남자는 군산 지리에 어두운 타지 사람들이 부주의할 수밖에 없는 좌회전 구간에 숨어 있다가, 불쑥 차 앞에 나타나 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5년 전이었지만 내 차에는 블랙박스가 달려 있었다. 시비를 걸 거나,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경찰을 부를 일도 없었던 셈이다. 블랙박스가 이미 모든 걸 찍고 기록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블랙박스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장 뜻밖의 정보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배우자의 불륜 행각이다. 과거에는 흥신소나 심부름센터를 이용해 배우자의 외도를 알아냈지만, 최근에는 블랙박스나 스마트폰 같은 첨단장치를 통해 배우자의 부정을 알게 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새로운 신조어도 등장했다. ‘블랙박스 의처. 의부증’. 설치를 요구하는 쪽과 설치를 거부하는 쪽의 논리가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 감정싸움 때문에 이혼을 하는 부부가 있을 정도다. 자동차 블랙박스는 이제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안전 도구 이외에 개인 CCTV나 차 안의 도청장치처럼 개인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수집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았던 영화들의 수많은 자동차 정사는 이제 사람들에게 이런 실질적인 경고를 내릴 수 있다.
네 (신제품) 블랙박스는 모든 걸 기록하고 있다! 너의 거친 그 숨소리까지!
어째서 차 안에서 대낮의 정사가 벌어질까. 우리가 ‘도덕’이라 말하는 규범을 벗어나는 일탈은 왜 전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을까. 그것도 자동차 안에서 말이다. 프란츠 요제프 베츠의 ‘불륜예찬’은 인간이 어째서 안정적인 파트너를 놔두고 새로운 상대와 종종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 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상대를 바꿔가며 성적 접촉을 하고 싶은 욕구는 인간적인 특징이며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전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포유류 중에서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는 비율은 3%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오랑우탄과 고릴라는 일부다처제 생활을 한다......사람들은 자신의 육체적 능력과 매력을 확인하기 위해, 따분한 일상에 에로틱한 자극을 주기 위해, 자신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해 관계 이탈을 시도한다. 생태계의 배경을 감안하면 인간이 배우자를 속여 가며 수없이 관계를 이탈하는 현상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류학자 조지 피터 머독의 연구에 따르자면,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채택한 문화는 인류 전체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엄격한 일부일처제는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으며 자연현상을 거스르는 문화적인 기준일 뿐이다.”
그는 인간이란 ‘생물학적으로’ 지조를 지킬 수 없는 존재라며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욕망’을 자동차의 다양한 부품이나 교통법규에 비유해 이렇게 규정한다.
“육체적 쾌락은 정지신호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언제나 좀 더 오래 머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만족했다는 신호를 보내야 할 일정한 목표라는 것이 없으며, 쾌락을 맛볼 때는 몰아의 경지로 들어가려는 경향이 강하다. 욕정은 제동장치가 없는 엔진과 비슷하다. 모든 욕정은 본질적으로 과잉 상태여서 끊임없이 한계를 넘을 것을 요구한다.....금지된 관계를 통한 쾌락은 처음부터 비극적 결말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독특한 방식으로 욕망의 정원을 풍요롭게 해주므로 자극적이다. 인간이 유독 자신을 잡아끄는 추한 대상에 분개하는 까닭은 그 속에서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확신과 성향 때문에 넘지 말아야 할 한계선을 돌파하는 모순적 존재다.”
진화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이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인간의 행동에 과학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 세상의 미세한 감정들을 그저 도파민과 노르아드레날린의 높은 수치로, 세로토닌의 낮은 수치로 표현하는 건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우리가 사랑을 ‘호르몬 칵테일’의 농간이라 말해 버리는 순간, 수많은 소설과 영화와 연극과 그림들, 우리가 소위 명작이라 부르는 작품들이 과학자들의 계량화된 연구소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과 공학의 발달에 따라 발명된 장치들로 인해 이런 인간의 욕망은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다. 불행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낯선 누구가와의 사랑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성적인 것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사회가 성을 터부시해 왔기 때문이다. 약속이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 것처럼 금기 역시 그렇다. 인간은 금지된 것을 주로 욕망하고, 금지된 만큼 생각하는 법이니까.
최근 미국 결혼변호사학회가 변호사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인용한 기사를 봤는데, 무려 92퍼센트의 사람들이 정보 수집을 위해 아내의 스마트폰이나 이메일, 남편의 자동차 블랙박스 등을 점검한 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었다. 정말 조심해야 할 것들은 어쩌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다는 경고문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글 ㅣ 백영옥(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