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트립
미국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친구들과 ‘로드트립’을 가는 것이다. 포틀랜드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운전시간은 10시간, LA까지는 18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한 두 시간 간격으로 휴게실에 가서 쉬는 우리와 달리, 미국인들은 대여섯 시간은 기본으로 운전을 한다. 그러니 혼자서 그 큰 대륙을 여행하기란 여간 만만치 않다. 친구들과 함께 자동차를 렌트해, 서부든, 동부든, 중부든 교대로 운전하며 대륙을 달려 각 주의 특징들을 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셈이다.
유럽을 여행할 때, 각 나라를 잇는 철도인 유레일 패스가 유용한 것처럼, 베트남이나 태국을 여행할 때, 어디든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스쿠터’가 유용하다. 한동안 포틀랜드에 머물렀는데, 미국의 포틀랜드를 가장 잘 여행하는 방법 중에 그곳의 명물인 ‘푸드 트럭’ 거리를 걸어보는 일이 있다.
멕시칸 타코, 일본의 돈부리, 태국의 파타야, 인도의 카레, 한국의 비빔밥까지 다양한 음식들을 파는 푸드 트럭들이 다운타운을 커다란 사각형 모양으로 감싸고 있는데, 대부분 6-7달러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소박한 음식들이다. 물론 푸드 트럭이라 기본적으로 팁은 없다. 오리건주에는 텍스도 없기 때문에 음식 값이 7달러라고 하면 그냥 7달러만 내면 된다. 뉴욕처럼 10달러짜리 음식을 시켰는데, 텍스와 팁을 합쳐 13달러 넘는 돈을 내야 하는 황망한 일 같은 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포틀랜드 시내 푸드 트럭의 매력에 빠져, 종종 그곳에 갔다. 12시가 되기도 전에, 근처 직장인과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인기 트럭 앞에는 긴 줄이 생겼다. 사람들은 깔깔대며 얘길 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페이스북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하면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기다릴 때 풍기는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들이 북적거리는 거리를 가득 메웠다. 내게 포틀랜드는 이 푸드트럭에서 풍기는 세계 각국의 향신료 냄새들과 종이 상자에 담긴 야키토리나 뜨거운 파타야를 들고 파이오니아 광장까지 배고픔을 참으며 천천히 걸어갔던 일로 기억될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영화 ‘셰프’는 제목처럼 요리사가 나오는 이야기다. 덩치가 넉넉한 주인공인 칼 재스퍼는 캘리포니아 LA의 일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유명 요리사인데, 자신의 음식에 인신공격에 가까운 리뷰로 최악의 평을 내린 유명 음식 블로거와의 다툼 끝에 자신의 새로운 트위터 계정에 악담을 퍼붓고 만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원하는 요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묻게 되는 직업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레스토랑을 찾는 사람들이 원하는 안전한 요리를 원했던 사장과 필연적으로 요리에 대한 철학으로 맞서게 되고, 결과적으로 실업자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남은 건 이제 베니스 해변 근처에 있는 아직 모기지가 한참 남은 작은 집 한칸과 이혼한 ‘전 아내’ 그리고 뉴올리언즈에 같이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상처받은 어린 아들뿐이다.
해고당한 요리사 잭에게 삶의 돌파구를 던져주는 건 예상 외로 그와 헤어진 ‘전 아내’다. 그녀는 그에게 늘 작은 푸드트럭이라도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일을 해보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한 번도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하지만 해고까지 당한 마당에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는 마이애미에 갔다가, 오래 전 먹었지만 기억에 또렷이 남았던 ‘쿠바 샌드위치’ 맛에 푹 빠진다. 그리고 곧장 리틀 하바나에서 먹었던 이 기막히게 맛있는 샌드위치를 사람들에게 맛보게 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는 낡아빠진 고물 트럭을 개조해 멋진 푸드 트럭을 만든다.
EL JEFE. 쿠바 샌드위치를 파는 이 푸드 트럭은 마이애미를 필두로 뉴올리언즈, 텍사스를 지나 캘리포니아까지 내처 달린다. 그들의 홍보수단은 트위터. 트럭이 멈추는 곳마다 사람들이 줄을 선다. 뉴올리언즈에선 프랑스 도넛에 설탕 가루를 입힌 ‘비네’를, 텍사스에선 그가 아는 가장 맛있는 숯불 바비큐를 굽는 장인에게서 가져온 바비큐로 만든 샌드위치를, 캘리포니아에선 3등분 한 끝내주는 ‘쿠바 샌드위치’를 만들어 판다. 그의 푸드 트럭은 점점 더 유명해져서 결국 그에게 최고의 악평을 날렸던 음식 평론가의 마음까지 움직인다. 이 영화의 주제는 비교적 명확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소박하고 맛있는 음식에 천국이 있다. 바로 그것이다.
요리사 칼 재스퍼가 만드는 음식들이 좋았다. 그는 농담을 잘 하고, 칼로리 따위를 신경쓰며 요란한 건강식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가 만든 요리 중에는 야밤에 친구에게 만들어주는 오일 범벅의 파스타도 있고, 버터를 잔뜩 바른 철판 위에 두툼한 치즈를 마구 넣어 만든 샌드위치도 있다. 모두 너무나 먹음직스러워서 잠시 영화를 멈추고 부엌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요리들이다. 우리가 사랑한 바로 그런 열량이 높고, 고소하고, 쉽게 소화되지 않는 푸짐한 음식들 말이다.
영화를 보다가 문득 한 친구가 떠올랐다. 당시, 나는 터키 레스토랑에 앉아 25센트짜리 동전을 보다가 ‘로드트립’이란 제목의 소설을 상상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역시 남자다. 그는 연인에게 영문도 모르고 차인 것도 모자라, 직장에서도 처참하게 해고당했다. 여러모로 칼 재스퍼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그에게는 도와주는 ‘전직 와이프’ 같은 건 없다. 그런 그에게 남은 건 주머니 속에 있던 25센트 짜리 동전 하나. 바로 연인과 헤어지기 직전, 그녀가 그에게 남긴 것이었다. 재밌는 건 미국의 25센트 뒷면의 디자인이 각 주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에게 있던 모든 돈을 털고, 심지어 2년 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동생에게 돈을 빌려, 그때부터 여행하기 시작한다. 미국의 52개주를 자동차로 여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향인 LA에서 출발한 그는 곧 각주를, 뉴멕시코와 오레건과 캘리포니아주를 돌아다닌다. 가는 길에 누군가와 동석을 하기도 하고, 바에 들려 자기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어째서 자신이 여기까지 흘러 들어오게 됐는지, 자신이 헤어진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녀가 얼마나 악독한 '나쁜 년‘인지에 대한 얘기를 말이다. 당연히 소설에는 사연 많게 생긴 한 여자가 등장하는데, 그 여자는 국적이 불분명한 아시아계 여자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고향인 LA로 돌아오던 어느 순간, 그는 웨스트 할리우드 근처의 대형 광고판에서 미국의 마지막 주인 알래스카와 하와이 광고판을 보게 된다. 이야기는 이 남자가 떠나게 될 새로운 여행, 눈 덮인 알래스카와 뜨거운 태양 아래의 하와이에 대한 몽상으로 끝난다. 알래스카 레일 로드에 대한 정보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흐르면서 말이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사실 많은 오해를 무릅써야 하는 일이다. 인생을 특히 ‘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만약 삶이 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라면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길 위’는 진짜가 아니라 가짜로,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추락할 뿐이기 때문이다. 아들러 심리학은 인생을 하나의 선이 아닌 ‘점(點)의 연속’이라고 주장한다. 인생은 ‘지금’이라는 무수한 찰나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로드 트립을 하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길 위를 떠나는 여행의 유일한 의미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길 위, 그 자체에 있다. 아무도 없는 길 위를 달리다보면 마주치게 되는 석양, 대지 위에 내리는 빗물, 먹구름 따위를 보면 지금이라는 시간이 문득 커다란 자동차 유리판 앞에서 내게 말을 거는 듯하다. 지나간 과거나,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빈틈없이 살게 한다. 운전을 한다는 것은 그제야 비로소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내 몸과 마음의 확장물처럼 그렇게 움직인다. 아름답고 처연한 그 풍경들 속에서 자동차가 아니라 내가 춤추듯 노래하며 달리고 있는 것이다.
글 ㅣ 백영옥(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