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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기타

신기주의 자동차와 남자 - 남자, 그리고 속도


콜벳


쪽으로 달렸다. 동해바다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동쪽으로만 달렸다. 옆자리엔 그녀가 앉았다. 헤어질 참이었다. 안 되는 사이였다. 엔진 소리가 공허했고 전조등 불빛이 시끄러웠다. 밤공기 속으로 질주했다. 자동차는 언제나 둘만의 공간이었다. 그녀를 붙잡은 채 내달렸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자동차는 일엽편주였다. 우린 작은 조각차에 몸을 실은 처지였다. 이 차마저 운명에 떠내려가면 끝이었다. 동해바다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땅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속도를 냈다. 


남자는 속도에 미친다. <비트>의 정우성은 고소영을 뒤에 태운 채 질주한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고소영은 정우성을 밀치며 말한다. “저능아 같아. 오토바이의 성능과 너의 성능을 혼동하지마.” 자동차의 성능과 자신의 성능을 혼동해서만은 아니다. 치기 어린 정우성보다 곱절은 나이가 먹고 나서도 남자는 속도에 미친다. 테스토스테론 따위에 지배당해서가 아니다. 남자는 치열하게 자유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상은 중력에 의해 지배당한다. 모든 물체는 서로를 끌어당긴다. 서로가 서로를 속박해버린다. 중력은 억압적이다. 그게 물질 세상이다. 인간 세상도 물리 법칙을 따른다. 인간은 인간을 끊임없이 끌어당긴다.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속박해버린다. 인간 사회 안에도 중력이 작용한단 얘기다. 


사회 안에서 남자는 중력의 무게를 감당하며 자라난다. 가족에서부터 사회의 중력이 남자의 어깨와 심장을 짓누른다. 여자에게도 중력은 작용한다. 하지만 여자는 중력의 하중을 수다로 풀어낼 줄 안다. 수다란 공감의 화술이다. 수다 떨 줄 아는 여자는 축복받았다. 그러나 수다와 공감은 남자의 몫은 아니다. 남자는 중력을 홀로 견딘다. 그렇게 훈련받고 강요당한다. 남자는 늘 아들이며 남편이며 아버지이다. 남자에게 중력은 숙명이다. 


콜벳


음 자동차 운전대를 잡았을 때 남자는 난생 처음 자유를 경험한다. 가속발판을 밟는 것만으로도 중력을 이기는 초월을 경험한다. 100미터를 3초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된다. 100킬로미터를 30분만에 오갈 수 있게 된다. 엔진에 시동을 거는 것만으로 중력을 능가할 권능을 얻는다. 이때부터 속도는 남자한텐 생명수와 같아진다. 속도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조차 없어진다. 바로 자동차가 남자의 일부가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남자는 이내 알게 된다. 아무리 속도를 내도 중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다.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은 찰나다. 짧을수록 애가 탄다. 남자는 속도에 중독된다. 자동차의 속도가 높아질수록 집중력은 커진다. 도로와 타이어와 엔진과 좌석과 운전대와 속도계를 통해 속도가 오감으로 느껴진다. 육감까지 더해 운전에 몰두한다. 바깥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바깥 세상은 스쳐지나 가는 점과 선들일 뿐이다. 자동차의 온갖 주행 정보들이 남자의 뇌리 속으로 타고 흐른다. 그때만큼은 자동차와 하나가 된다. 오직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기계가 된다. 속도는 해방이다.


그러다 이내 남자는 속도의 상대성 원리에 집착하게 된다. 남보다 상대적으로 빠른 것에서 위안을 찾는다. 속도는 곧 승부가 된다. <러시 : 더 라이벌>의 두 주인공 제임스 헌트와 니키 라우다는 이기기 위해 속도를 낸다. 두 사람은 1976년 F1 월드 그랑프리 챔피언쉽에서 건곤일척의 명승부를 펼쳤다. 두 사람은 상극이다. 오스트리아인 니키 라우다한테 속도는 통제의 대상이다. 목적이 있어야 가속발판을 밟는다. 잉글랜드인 제임스 헌트에게 속도는 자유의 수단이다. 둘 다 무한대의 속도를 체험한 F1레이서들이다. 속도의 극한을 경험하고 돌아온 두 사람은 속도보단 승부에 집착한다. 비교 대상이 있어야 속도를 체감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일반 도로에서도 이런 남자들은 흔하다. 추월과 끼어들기에 집착하는 남자들이다. 남보다 앞서는 속도감을 즐긴다. 그들에게 속도는 경쟁이다. 남자는 속도의 쾌락도 즐기게 된다. 속도는 권력이며 권력에는 여자가 따른다. <007>의 제임스 본드는 급가속을 하며 곡선구간을 돌 때마다 여자를 갈아치운다. 여자는 속도에 유혹당한다. 물리 법칙을 초월하는 남자는 섹시하다. 여자는 중력을 이겨내는 남자한테 매력을 느낀다. 


남자는 속도로 저항한다. 중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넘어선다. 중력에 도전한다. 세상은 중력을 어지럽히는 존재를 단속하기 마련이다. 늘 제한속도란 걸 둔다. 하지만 남자는 세상의 제한속도를 무시하고 싶다. <분노의 질주>의 빈 디젤과 폴 워커가 그런 남자들이다. 빈 디젤은 건달이다. 폴 워커는 FBI의 수사관이다. 하지만 둘은 속도로 마음이 맞는다. 두 남자는 흉포한 속도로 세상을 초토화시킨다. 속도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명쾌하다. 빠른 것과 느린 것이 있을 뿐이다. 두 남자는 빠른 세상에서 살기로 결심한다. 


러나 어떤 남자는 이쯤에서 속도를 늦춘다. 속도가 주는 승부와 쾌락과 저항에서 멈춘다. 그리고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건 자동차라는 기계덩어리가 빌려주는 성능이 아니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애쓰는 소년의 모습도 아니다. 더 빠르고 덜 빠른지를 겨루는 내기도 아니다. 여자를 유혹하는 기술도 아니다. 단지 빠르면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분법적 결심도 아니다. 


남자의 진정한 속도는 자기만의 속도에서 나온다.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자기만의 속도계에 맞춘 주행 속도가 있다. 누군가한텐 빛보다 빠른 속도다. 누군가한텐 걷는 것만큼이나 느린 속도다. 남자는 미친 듯이 달려서 이겨도 보고 처절하게 뒤쳐져도 본다. 그렇게 자신의 속도를 찾게 된다. <그랜 토리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런 남자다. <그랜 토리노>에서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월트는 아주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그에겐 세상의 속도는 무의미하다. 자기만의 속도가 있기 때문이다. 월트는 1972년산 그랜 토리노와 닮아있다. 좀처럼 움직이진 않지만 분명 자기만의 속도로 달릴 줄 아는 자동차다. 동네 건달들이 월트 앞에서 속도를 뽐낸다. 월트는 비웃는다. 월트도 그런 속도로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으려고 애쓰던 청년이었다. 이젠 세상의 속도를 자기 속도에 맞추는 노년의 사내다. 자기 속도에선 눈 앞의 곡선도로와 비탈길과 빗길을 예측할 수 있다. 필요하면 추월도 가능한 여력도 있다. 그렇게 가능한 멀리 오래 그랜드 투어링을 할 수 있는 속도다. 자기 속도를 찾는 남자는 장도를 떠날 수 있는 그랑투리스모가 된다.


카마로

비로소 속도를 이해한 남자는 멋있다. 남자는 여전히 중력에 지배당하지만 중력에 굴종하진 않는다. 때론 중력을 농락하고 때론 중력에 순종한다. 그건 교통의 흐름을 타고 흐르며 순리대로 운전하는 노련한 운전자와도 닮아 있다. 남보다 더 빠를 필요도 없다. 도로가 아닌 곳으로 무모하게 달릴 필요도 없다. 신호를 지키지만 누구보다 먼저 간다. 

남자는 속도에 미친다. 중력은 남자가 평생 싸워야 할 대상이다. 날아서 지구상을 벗어날 수 없는 남자는 달려서 지구 위를 질주하는 수밖에 없다. 속도는 남자한테 주어진 유일한 물리적 자유다. 자동차가 있어서 20세기 남자들은 비로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제 남자는 시속 300킬로미터로도 달릴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날 수도 있고 우주로 벗어날 수도 있다. 자동차는 성능 개선을 거듭한 끝에 1세기만에 남자를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해방시켰다. 그래서 더 이상 물리적인 속도는 의미가 없다. 속도를 이해해야 속도를 낼 수 있다. 그런 남자는 속도를 지배하게 된다. 속도를 이해하면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 


동쪽으로 달렸다. 속도로 세상을 지워내고 싶었다. 수많은 차들을 추월했고 수많은 도로를 짓밟았다. 속도의 끝에서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렇게 땅끝까지 갔다. 파도 소리가 잔잔했다. 


돌아왔다. 돌아올 땐 아주아주 느리게 달렸다. 더 이상 자유로울 것도 이겨야 할 것도 반항해야 할 것도 없었다. 속도를 낸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인연이 아니었다. 둘은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물리적 속도론 중력을 이길 수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더 이상 속도에 의지하지 않았다. 이걸로 충분했다. 속도에 흥미를 잃은 건 아니다. 가속페달을 밟고 추월하며 남보다 우월하다고 으스대는 속도를 잊었을 뿐이었다. 르망24의 레이서들은 속도를 다투지 않는다. 더 빠른 쪽보다 더 오래 가는 쪽이 이긴다. 더 멀리 가기 위해선 자기만의 속도를 알아야 한다. 서두르면 지치고 지치면 멈춘다. 르망24의 레이서들은 한적한 시골길을 24시간 동안 달리고 또 달린다. 오직 자기 자신과 속도로 경주를 벌일 뿐이다. 그날부터였다. 르망24의 8.1마일 경주로를 달리듯 꾸준한 속도로 운전하기 시작했다.  


글 ㅣ 신기주(에스콰이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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