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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기타

백영옥의 자동차 일상다반사 - 내가 기억하는 영화 속 자동차


델마와 루이스

영화 <델마와 루이스>  


국의 BBC 온라인 판에 실린 흥미로운 기사 하나. 영화에 등장한 자동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차는? 1위는 1977년 영화 007시리즈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 등장했던 영국의 스포츠카 '로터스 에스프리(Lotus Esprit)'로, 영화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자동차로 선정됐다. 자동차에 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나도 이 자동차는 기억하는데, '로터스 에스프리'는 영화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서 주인공인 로저 무어가 추격전 끝에 바다 속으로 뛰어들며 잠수함으로 변신하던 흰색 자동차다. 


이 기사에 의하면, 로터스 에스프리의 뒤를 이은 영화 속 최고의 자동차로 영화 '백 투더 퓨처'에 등장한 '드로리언(DeLorean)'이 뽑혔다. 이 자동차는 영화 속에서 타임머신으로 개조된 스포츠카로 등장했다. 3위는 벤 스틸러와 오웬 윌슨 주연의 영화 '스타스키와 허치'의 '포드 토리노(Ford Torino)'. '허비: 더 러브 버그'의 '폭스바겐 비틀(VW Beetle)'이 4위 그리고 '배트맨'의 '배트모빌(Batmobile)'이 5위를 차지했다. 물론 순위에 영국 차가 유독 많이 눈에 띄는 건, 영국인들을 상대로 조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만약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자동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차를 꼽으라고 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던 자동차를 뽑겠다. 그랜드 캐년의 절벽 위를 새처럼 날아가던 그 자동차 말이다. 영화는 자동차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끝내 보여 주지 않는다. 그저 멈춰선 그대로, 정지 상태로 끝난다. 가장 비극적일 수 있는 장면에 ‘멈춤’ 버튼을 눌러 비극을 아름다운 해피엔딩처럼 마무리 지은 것이다. 그 자동차는 포드의 1966년형 썬더버드다.  미국차답게 엄청나게 길고 커다란 오픈카로, 당시 미국의 아이콘이나 마찬가지였던 쉐보레 콜벳의 인기와 함께 만들어진 차량이었다. 델마와 루이스는 이 자동차를 타고 일상을 탈출해 여행을 떠난다. 


델마와 루이스


낙 오래된 영화라 줄거리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 같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활발한 성격을 가진 가정주부 델마(지나 데이비스)가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그녀의 친구인 루이스(수잔 서랜든)와 의기투합하여 주말에 별장을 빌려 함께 지내기로 하고 여행을 간다는 내용이다. 여행가는 것까지 아이처럼 남편에게 허락받아야 할만큼 수동적으로만 사는 델마와 사는 것이 영 공허한 루이스는 각자의 집에 간단한 메모만 남긴 채 그렇게 긴 여정에 나선다.  


하지만 여행으로 들뜬 기분에 남자와 술을 마시다가 곧 치한으로 돌변한 남자가 델마를 강간하려 하자, 루이스가 총으로 쏴 그를 죽이는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게 여행은 악몽으로 변하고, 이들은 졸지에 1급 살인범이 되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루이스의 돈을 제이디(브래드 피트)라는 건달이 훔쳐가는 바람에 이들은 별 수 없이 돈까지 훔치게 된다. 결국 수배 중인 이들은 차를 몰고 가는 동안 따라 그들의 차에 바짝 따라붙은 유조차 트레일러 운전사와(여자에게 성희롱을 마다하지 않는 마초로 등장!) 시비 끝에 트레일러의 차바퀴를 쏴 버린다. 벼랑 끝까지 몰린 이들은 결국 경찰과 대립하게 되고, 죽음을 선택한다. 



브래드 피트

  


마가 남편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바람둥이 제이디다. 그 잘 생긴 청년이 ‘브래드 피트’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한 번쯤 이 영화가 더 보고 싶어질 거다. ‘리즈시절’의 미모를 새삼스레 재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얼핏 ‘델마와 루이즈’는 ‘여행을 떠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 여자들이 구속 대신 자유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페미니트스들의 교과서처럼 느껴지지만,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신나고 아름다운 영화다.    


‘델마와 루이스’가 전형적인 로드 무비라면 ‘멋진 하루’는 좀 기이한 로드 무비다. 자동차 운전석에 앉은 무뚝뚝한 전도연의 얼굴에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역시 운전석에 앉아 피식 웃는 전도연의 얼굴로 끝난다. ‘멋진 하루’는 헤어진 애인 병운(하정우)이 희수(전도연)에게 빌린 돈 350만원을 갚기 위해 자신이 ‘아는 여자’들을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멋진 하루

영화 <멋진 하루> 

떼어먹은 애인에게 찾아가 “야! 돈 갚아!”로 시작하는 이야길 집중해서 본 건, 경마장에 앉아 도박하기에 여념이 없는 뻔뻔한 남자 병운에게 실제 돈을 꿔 주는 ‘여자들’이 있다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 남자, 정체가 뭘까. 어째서 이런 허랑방탕한 남자에게 여자들은 돈을 꿔주는 걸까? 이때 서울은 그런 맘 약한 여자들이 사는 멜랑꼴리한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그녀들이 병운에게 돈을 꿔 주는 장소 역시, 건물 맨 꼭대기의 골프 연습장부터 고급스런 주상복합 건물, 이태원의 골목, 지금은 없어진 한남동 KFC 앞, 서울 변두리의 어느 수퍼마켓 앞까지 참 다양하다. 


희수의 차를 타고 돈을 꾸러 다니는 병운의 동선을 살피면 서울의 지도가 그려진다. 이들이 개발되고 있는 용산을 지나 비가 오면 물에 잠기는 감상적인 다리 잠수교를 지나, 아직 개발되기 전인 이태원과 종로 뒷골목까지 이르렀을 즈음엔 삼십 몇 년을 줄곧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이 도시에 대한 애잔한 감정이 온 몸으로 젖어드는 기분이었다. 


멋진 하루


내가 좋아하는 서울을, 이런 느릿한 리듬으로 그려낸 영화는 ‘접속’ 이후 처음이었다. 헤어진 남자와 자동차를 타고 느릿하게 움직이며 이태원, 옥수동, 내방역, 청파동 어디 즈음을 이동할 때, 나는 마치 헤어진 연인들을 차례로 호출해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 조수석에 앉히고 싶은 기막힌 심정이 되어 버렸다. 사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공간은 내가 직접 걷고, 물건을 사고, 남자와 포옹하고 헤어졌던 공간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야 나는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을 알게 되었는데, 흥미롭게도 ‘My dear enemy'라는 '멋진 하루'의 영문 제목은 서울에 대한 양가적인 내 감정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자동차 안에 앉아 있던 희수는 병운과 가뿐하게 작별 인사를 한다. 영화 내내 이들이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란 기대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배반하는 엔딩이다. 다만, 짙은 스모키 화장으로 자신의 풍부한 표정을 숨겨 버린 전도연이 “실컷 욕이나 해주려고 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웃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20년 전 ‘접속’에 등장했던 그녀의 옛 모습이 떠올랐다. 어쩜 이 마지막 장면 하나만으로도, 삭막한 서울에서 도시의 네온사인을 별이라 생각하며 자라난 아이들에게 이 도시가 줄 수 있는 하루치의 위안을 다 받은 느낌이었다. 


특히 ‘멋진 하루’의 영화음악은 서울을 운전하며 듣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드라이빙 뮤직’이라 명명해도 좋을 재즈풍으로 ‘10:12 AM, 3:04 PM, 6:43 PM, 11:59 PM’ 등 시간으로 나누어져 있어, 자신이 운전하는 시간대를 선택해 들어보는 재미도 있다.  


글 ㅣ 백영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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