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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사회공헌

콩고 난민 도나 욤비씨 가족이야기

콩고 난민 도나 욤비씨 가족이야기


콩고는 벨기에의 지배를 받다 1960년 독립하였습니다.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면서 3차례의 참혹한 내전을 겪으면서 4백만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콩고는 내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고 합니다.

도나 욤비씨는 콩고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로 콩고 대통령궁내 국가1급 정보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반정부단체들과 야당 의원들에 대한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권력을 휘두르며 반정부 인사들을 마구 잡아들여 살해하는것을 보며 독재 정권에 대한 회의를 느꼈고 욤비씨는 마음을 돌려 반정부 인사를 돕기로 결정하여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반정부 인사들을 몰래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욤비씨의  반정부행위가 들통나 체포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으나 정보기관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하여 중국을 거쳐 2002년 한국에 들어와 망명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도나 욤비씨의 한국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한국의 까다로운 난민 심사에는 6~7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난민신청을 하고 난민 자격을 부여받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그의 인생 행로는 정말 처참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생활환경이 너무 다른 한국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콩고에선  경제학 박사학위까지  가진 엘리트였고  아버지가 의사로 콩고에서는 그래도 부유층에 속하는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욤비씨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료공장, 제지공장, 섬유공장등을 전전하며 하루 14시간 이상의 막노동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사료공장에서 일을하고 집에 돌아가다 탈장으로 길에 쓰러져 30여분간을 고통스러워 하는데도 누구하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며 눈물을 글썽이었습니다.

콩고 난민 도나 욤비씨 가족이야기


2009. 12.18일 중앙일보에서 난민에 대한 기사를 다루면서 도나 욤비씨의 가족을 취재하여 기사를 게재하였습니다. 이 기사를 접한 지엠대우 제이쿠니 부사장은 지엠대우한마음재단을 통해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며 제안을 했고 크리스마스에는 빈 냉장고에 먹을거리가 가득하도록 채워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슨 음식을 좋아할까?
아이들은 어떤 과자를 좋아할까?  우리를 반갑게 맞이 할까? 크리스마스 선물은 뭐거 좋을까 ?
많은 생각이 교차하였습니다.
작은 것 하나 하나를 신경쓰며 냉장고에 채울 음식을 고르는 시간만 2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콩고 난민 도나 욤비씨 가족이야기

콩고 난민 도나 욤비씨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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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비씨는 부인과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세자녀의 이름은 "나비, 조나단, 파트리시아" 입니다,
나비, 조나단, 파트리시아는 산타복장을 하고 집을 찾은 우리들을 너무나도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아직 서투르긴 하지만 한국어로 대화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질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주고 케익도 자르고 징글벨도 함께 부르며 모처럼 따뜻한 마음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욤비씨가 한국에서 난민지위를 받기위해 6년간 힘든 생활을 하는동안 부인과 세 자녀 또한 콩고에서 너무나도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기도 없고 수도물도 나오지 않는 빈민촌을 전전하며 하루 하루 먹거리를 걱정하며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러는 동안 부인은 심한 우울증과 허리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욤비씨는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2008년 2월에야 모든 내용이 사실로 판명되어 한국에서 난민지위를 받았습니다.
난민지위를 받은 욤비씨는 콩고내에 있는 가족을 찾기 시작하였고 교회의 도움을 받아 2008년 8월 가족 모두가 한국으로 들어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욤비씨 가족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가족들의 최소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생활비와 부인의 치료비였습니다.
지엠대우한마음재단에서는 이들을 위해 매월 생활비 일부 보조와 부인의 병이 완쾌될 때까지 치료비를 지원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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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회사에 처음와 본 아이들은 자동차를  둘러보며 너무나도 신기해 했습니다.
 "참 신기해요" 를 연발하였습니다.
큰 아들 나비는 " 내가 커서 돈 많이 벌면 꼭 지엠대우차 살꺼예요 "  정말 생각만이라도 기특하기만 합니다.
작은 아들 조나단은 " 어떻게 이런 차가 굴러 다닐 수 있어요? " 하며 모든것이 궁금한가 봅니다...
6년동안 그렇게 힘들게 생활해 왔다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밝고 예의도 바르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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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비씨는 인천에 있는 교회의 도움으로 15평규모의 작은 연립주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5식구가 살기에는 너무나도 좁아보였습니다.
오래된 주택이라 난방은 물론이고 벽에서 누수현상도 곳곳에서 있었습니다.
욤비씨 집을 찾을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 빨리 수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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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세 자녀에게는 한국문화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특기적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비와 조나단은 축구를 배우고 싶어했고, 파트리시아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했습니다.
지엠대우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인천유나이티트 유소년 축구교실에서 나비와 조나단을 축구교실에 초대하여 지도 하고 있고,  또한 인천의 유명 오페라단인 미추홀오페라단에서 파트리시아의 피아노교습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한손으로 띵동띵동하고 있지만 10년후에 피아노의 거장으로 태어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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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에는 눈이 없어요. 한국에서 눈을 처음 봤는데 정말 신기하고 멋있었어요.. 내 소원은 눈이 많은 곳에가서 썰매도 타고 스키도 타 보는거예요" 큰아들 나비는 꼭 한번 스키장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금요일 저녁 일과를 마치고 욤비씨 가족을 모두 태워 베어스타운 스키장을 찾았습니다.

콩고 난민 도나 욤비씨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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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타보는 스키... 정말 무서워 내려오질 못하더군요.. 용기를 내어 초급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던 나비와 조나단이 30분이 넘어도 내려오질 않더군요. 걸어서 올라가보니 무서워 도저히 못내려가겠다면서 스키를 벗어들고 걸어 내려오고 있었어요.. 정말 천진난만한 아이들... 우리 모두가 함께 있어줘야 할 것  같았어요..

욤비씨 부인 렐리씨는 우울증과 허리에 심한 통증이 있어 병원에 진단을 받으러 갔어요..
다행스럽게도 허리디스크 증상은 심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수술은 안해도 되고 물리치료를 3개월정도 받으면 된다고 하네요..

온 가족이 지엠대우의 협력병원인 UIC시카고치과병원에 초대 받았어요.
가족 모두에게 치과 질환 검진을 해 주겠다고 해서입니다.  의외로 모두 이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UIC시카고치과병원에서 고맙게도 평생 이 가족의 진료를 무료로 해 주겠다는 약속도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한국에는 고마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콩고 난민 도나 욤비씨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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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욤비씨는 정말 행복하다고 합니다. 8년이라는 한국 생활속에서 너무나도 힘든 일들만 겪어 왔었는데 이제서야 한국이 내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흑인이라고 놀리고 무시하고 아프리카로 돌아가라고 놀려댈 때  너무나도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한국사람에 대한 좋은 감정들이 하나씩 하나씩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정말 따뜻하다는것도 알게됐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하는것도 알게 되었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욤비씨는 나를 형님이라고 부릅니다. 친 형님보다도 더 따뜻한 큰 형님으로요..

이제 욤비씨 가족을 위한  마지막 한가지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욤비씨 직장을 잡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게 하는 것 입니다.
한국 성공회대학에서 NGO관련 석사학위를 받은 욤비씨는 아직 한국어가 서툴러 정신적인 노동을 제공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 힘든 육체적인 노동을 또 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욤비씨의 취업을 위해 다시한번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욤비씨가 한국 생활에 잘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모두 모두 기원해 주세요..
감사합니다.